삶에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 결혼이나 죽음이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처럼 거대하거나 대단한 사건은 아니고, 작고 뱃속이 꼬이는 듯한, 이름 붙이기도 애매한 어떤 순간들. 예를 들면, 여름 어느 날 저녁, 방에서 FC서울 관련 뉴스를 보고 있다가 기성용이 포항으로 이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런 순간. 이게 무슨 TV드라마도 아니고. 그런데도 갑자기 기분이 싸구려 커피처럼 식는다.

기성용은 우리가 생각보다 오래 함께한 이름이었다. 물론 나는 그를 엄청나게 좋아하진 않았다. 서울에서 전성기를 너무 짧게 보냈고, 철없는 젊은시절이 있었고, 전술에 따라 그 중요도가 너무 달라지는 선수랄까. 하지만 그가 서울에서 뛸 때면 경기장은 늘 진지해졌고, 그의 존재는 항상 경기장 안, 밖으로 팀의 중심에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괜히 트집을 잡으며, 기성용은 이제 늙었고, 느리고, 전술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식의 ‘거리 두기’는, 어쩌면 내가 미리 실망하지 않기 위한 자기방어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팀이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몇 안 되는 선수였고, 팀이 필요로 할 때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동 감독 체제에서 시즌 초반 중용받던 그의 존재가 점점 투명해졌고, 결국엔 필요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았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필요했다.팀그 누구보다 높은 퀄리티의 축구를 구사하는 그를 후반 교체 카드로라도, 아니 벤치에서 정신적 지주역할이라도 충분히 써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감독과 구단은 그 선택지를 외면했다.

기성용이 떠난다고 하니, 마치 익숙한 배경음악이 갑자기 꺼진 것처럼 이상하게 허전하다. 경기장에서 더이상 서울의 진군가가 들리지 않는 느낌이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의 붉은 깃발이 더이상 펄럭이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서울 팬들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단순한 전력 손실 때문이 아니다. 우린 그 이상을 알고 있다. GS라는 대기업의 자회사라는 것도, 팀이 순정적인 낭만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은 이 구단을, 이 유니폼을, 이 검빨의 유니폼 색을 일종의 자기 정체성처럼 여겨왔다. ‘그거 그냥 축구팀이야’라는 말을 수천 번 들어도, 서울 팬들에게는 내 팀이고 내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점점… 너무 이상하게 끝나고 있다. 그리고 새로 쓸 여력도 없어 보인다.

기성용 이전에도 서울은 수많은 레전드급 선수를 조용히, 혹은 무심하게 떠나보냈다. 고명진, 이청용, 박주영, 오스마르, 고요한. 떠나기 전 팬들에게 손 한 번 제대로 못 흔들고, 인스타 공지글로 “잠깐의 이별, 추후에 다시 만나요” 정도로 끝나는, 양복을 입고 이상하게 은퇴하는 이별. 우리는 그저 [단독]기사를 통해, 또 하나의 작별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FC서울은 K리그에서 몇 안 되는, 아니 거의 유일하게 유소년을 육성하여 K리그에서의 활약을 기반으로 유럽으로 보내 ‘K리그에서 잘하면 세계에서도 통한다’를 보여준 박지성의 다음 길을 열어준 구단이다. 그들이 10년쯤 지나 다시 복귀해 레전드가 되는 서사를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팀이었다.

박주영에서 기성용과 이청용으로 이어지는 K리그 센세이션과 유럽에서 성공적인 모습, 그리고 K리그 복귀후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드라마. 우리는 그걸 사랑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귀환과 재회의 신화를 축구판에서 보고 있었던 셈이다. 서울 팬들은 그 방점을 멋진 은퇴식으로 찍고 싶어했다.

그런데 지금은, 기성용마저 그렇게 보내고 나니, “다시는 돌아올 곳이 아니다”라는 결론이 남는다. 마치 텅 빈 무대에 조명이 꺼지고, 연출이 “끝났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팬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구리 챔피언스파크 앞에는 근조 화환이 놓였고, ‘레전드까지 내쫓는 감독’, ‘김기동 나가’, ‘낭만도 성적도 잃은 구단’ 같은 팻말이 달렸다. 어떤 팬들은 트럭을 대절해 GS그룹 본사 앞으로 갔다. 거기서 LED 화면에 “기성용 보내지 마” “GS는 기둥뽑고, FC서울은 레전드 뽑는다” 같은 문구를 뿌렸다. 이쯤 되면 집단 실연 후 단체 복수극이다. 웃프다.

결국 이 모든 건 구단의 철학없는 구단 운영에서 비롯되었다. 팬은 기억하려 한다. 구단은 잊으려 한다. 이 괴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그리고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더이상 ‘레전드’라고 불릴 수 있는, 또는 불릴 가능성이 있는 선수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FC서울과 GS는 10년 이상 쌓아올려야 만들 수 있는 이 멋진 서사를 벌써 몇차례 날려 먹은 것이다.

기성용의 이적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시스템이 박살나는 소리이고, 정든 일상이 조금씩 사라지는 과정이다. 그리고 나도 이제 그런 걸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다가올 포항 경기를 본다. 혹시 모르니까. 레전드를 저버린 팀이 승승장구 할 수 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가 더 이상 FC서울을 진지하게 응원할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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