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운동장 장충고 vs 한서고 리뷰 feat. 장충고 응원가

사람들은 야구에 열광한다. 하지만 나는 야구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다. 


 내가 야구에 짜게 식어버린 건 2003년도다. 야구라는 스포츠 때문에 식어버린건 아니지만.. 그때 이야기를 좀 풀어보자면 이렇다. 


 80년대 당시 모교인 장충고는 당시 야구부가 있었는데 야구도 명문, 공부도 명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내가 다닐때는 아니었다. 우리들끼리는 약수상고니, 장충공고니 하며 모교를 비웃고 다녔다. 


 03년 초여름 지금보다 야구에 더 관심없던 그 시절, 동대문야구장이 있던 시절이다. 그곳에 장충고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가 응원을 펼쳤었다. 


 장충고는 남고인데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고등학교에 교복도 없고 두발도 자유라 학생들은 자유분방함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지금은 교복이있다.) 거기에 남고라니 얼마나 통제불능이었는지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일 것이다. 


 당시 장충고는 일반적인 인문계 고교와 달리 학업에 관심있는 친구들은 몇 없었다. 당시 전교 1, 2등이 있던 우리반은 전교 평균 꼴지였다. 



 그 시절 동대문야구장으로 돌아가보면 이제는 없어졌지만 그곳엔 천정 지붕이 없어 뙤약볕을 그대로 맞아야 했다. 그리고 우리의 반대편에는 한서고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앉아있었다. 



 장충고에는 장충고만의 독특한 응원가가 있었다. 어디가서 섣불리 이야기할 수 없는 내용의 응원가인데 다음과 같다. 


갈고리 촌충, 민촌충,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장충, 장충, 대장충! 야!


 이 이상한 응원가는 당시 우리에게 하나의 큰 즐거움이었는데 우스꽝스럽고 응원의 의미가 전혀 들어있지 않아서 일 것이다. 


 이 응원가는 선배들이 수능을 보러 갈때라던가 무언가 응원을 해야할 일이 생기면 여지없이 튀어 나왔는데 수치심은 듣는 사람의 몫이었다. 우리 야구부가 1회전 탈락을 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동대문운동장은 뙤약볕이었다. 소낙비가오다 말다 해서 다들 우산이 있었지만 우산을 못피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쨋든 저 갈고리로 시작하는 응원 앞에는 선창이 있었는데 욕설이 섞여있었고 띠꺼우니 갈고리를 부르자! 갈고리 준비! 하면 구령이 얍! 하고 붙는다. 갈고리 시작! 소리에 맞춰 응원구호를 다들 외치는데 몇몇 친구들은 몇몇 긴 회충의 이름을 쫓아오지 못하기도 했다. 그보다 도대체 왜 갈고리를 부르는건지 아직도 의문이다. 


#58회 청룡기전국고교야구 1차전 장충고 vs 한서고


 한서고와 일전은 야구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모르겠으나 야구를 안보는 친구들에게는 고역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남성호르몬이 폭발하는 시기의 남아들을 조박만하고 가열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갈고리를 외치게 하다니.


 그날따라 우리의 갈고리 응원은 초라하게 느껴졌다. 당시 상대팀 한서고는 남녀공학에 교복도 입어 단합된 모습에 응원단장까지 있었다. 반면에 우리는 추리닝(트레이닝복이라고 하기엔 너무 비루해서 추리닝이다.)에 티쪼가리를 입고 있던 마치 헐값에 모든 의뢰를 수락하는 싸구려 용병단 같은 몰골이었다. 우리가 외치는 갈고리촌충 민촌충. 둔감한 소년이었던 나조차도 조금은 부끄러웠다. 


 부끄러움도 잠시 신기하게도 우리는 남녀공학이었던 한서고에 엄청난 적개심이 생겼다. 주위를 살펴서 일지도 모른다. 내 주변엔 징글징글한 남성호르몬덩어리가 바글바글한데 한서고에는 예쁜 여고생이라니!(당시에는 군대시절 마냥 이성은 다 예뻐보였다.) 적개심 가득한 우리의 갈고리 응원에도 불구하고 우리학교는 패배했다.


 경기는 장충고가 무안타 4득점을 올리는 대단한 득점력을 보여줬으나 6회말 후둘겨 맞으면서 6-4로 대역전패 하며 패배했다.


 1회전 탈락에 다시 응원오지 않아도 된다며 안심하면서 터벅터벅 복귀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가지고 있던 야구에 대한 생각은 뜨겁고 씁슬하고 습했던 기억으로 짜게 식어갔다.  그리고 동대문운동장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요즘은 꽤 하는 우리학교>


이게 내가 야구에 대해 완벽하게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 이유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