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의 소설은 대학 시절 읽었던 ‘마의 산’ 이후 오랜만이다. 지독하게 긴 문장에 어려움을 느꼈던 기억이 있어서 꺼려졌으나, 열린책들 35주년 기념판의 도장깨기를 진행중이었으므로 도전했다.
소설은 역시나, 긴 문장과 복잡한 심리묘사가 가득했다. 다만 나도 대학시절 보다는 늙었는지 독서에는 무리가 없었다. 한편의 모노 드라마처럼 길고 긴 토니오 크뢰거의 대사가 쏟아진다.
토니오 크뢰거는 독일의 20세기 제일의 작가. 토마스 만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토니오 크뢰거라는 인물의 성장을 쫓아가며 그가 자아를 찾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토니오 크뢰거는 독일 북부의 청렴하고 엄격한 독일인 관료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남부 이탈리아의 아름답고, 만돌린을 잘 켜는 예술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시와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 남들과 다른 관심사에 주변 인들을 그를 약간 괴짜처럼 바라본다.
토니오 크뢰거는 유년시절 동경하던 동급생과 자신의 다름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나이가 들어 사교계에 입문할 무렵에는 아름다운 소녀의 자태에 매료되어 짝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동급생에게 불변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던 그는 대상이 바뀐 것에 대해 크게 괴로워 한다. 시와 문학에 심취한 그는 자라온 평범한 독일 북부에 어울리지 못한다.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금새 다른 남자를 만나 남쪽 나라로 떠난다. 토니오 크뢰거는 고향을 떠나 작가가 된다.
그는 작가가 된 이후에도 인간에 대한 혐오와 말과 언어의 아름다움, 예술가와 대중 사이에서 괴리감에 불편을 느끼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어느날 화가인 여자친구는 자기연민?에 빠진 그에게 ‘길을 잃고 헤매는 시민’이라는 표현으로 그의 고민에 도움을 준다.
자, 그럼 말하지요! 그 해답은 지금 이곳에 앉아 있는 당신은 누가 뭐래도 한 사람의 시민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요? 그는 이렇게 물으며 약간 주저앉는 듯 했다.
그렇지 않아요? 충격이 크겠죠. 또 당연히 그래야 하고요. 그러니 형량을 조금 줄여 주려고 합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당신은 <길을 잘못 든 시민>입니다. 토니오 크뢰거 <길을 잃고 헤매는 시민>이지요.
그말을 들은 토니오 크뢰거는 햄릿이 고뇌에 빠졌던 북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덴마크로 가는 길, 자신의 고향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는 자신이 살던 어린시절 평범하게 어울리지 못하고 겉 돌았던 도시에 향수를 느끼고 마을을 돌아본다.
덴마크로 향하는 날, 고향 호텔에서 도망중인 사기꾼으로 몰려 조사를 받는다. 여권이 없던 그는 자신의 이름이 쓰인 원고를 보여주며 신분을 증명하게 되는데, 자신의 작품에 쓰인 이름으로 오해를 푼 상황에 이상하고 씁슬한 기분을 느끼며 고향을 떠나 덴마크로 향한다.
저 별들을 좀 보십시오, 선생님! 별들이 참 총총 빛나고 있군요. 원, 하늘이 온통 별 천지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저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중에 많은 별들은 이 지구보다 백배는 더 크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우리 인간들은 전보를 발명해 냈습니다. 전화와 그것 말고도 오늘날 근대적인 수많은 성과물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우리가 사실 벌레, 가련한 벌레에 불과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납득하게 됩니다. 선생님. 내 말이 맞습니까, 아니면 틀렸습니까? 그래요, 우린 벌레에 불과하다니까요?!
덴마크의 한 항구도시에서 토니오 크뢰거는 자신이 유년-청년기에 사랑했던 동급생과 여인을 만나게 된다. 금발에 아름다운 그들은 고민없이 호텔에서 파티를 즐긴다. 과거와 현재, 짝사랑하던 그들과 자신의 현재 모습에서 엄청난 질투와, 분노, 자기연민, 안도와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토니오 크뢰거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한다.
주류 세계에 어울리지 못한 성장기 - 그리고 성인이 된 후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토니오 크뢰거의 부모처럼 토마스 만의 부모도 서로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엄격한 독일인 아버지와 열정과 낭만, 여유를 지닌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부모의 성향차이로 인해 성장과정에서 많은 고뇌와 방황에 빠졌다.
난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어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게 좀 힘이 듭니다. 당신같은 예술가는 나를 시민이라 부르고,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둘중에 어느 쪽이 더 내 마음에 쓰라린 상처를 안겨 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시민들은 어리석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진한 감동이 없고 그리움이 없다고 말하는, 미를 숭배하는 당신같은 사람들은 예술가 기질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가 짝사랑했던 소년과 소녀는 당대를 대표하는 세속적인 부루주아의 모습이다. 그는 그들을 사랑할 만큼 지독하게 동경하면서도 경멸한다. 예술가인 여자친구와의 대화에서는 시민 그리고 예술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고민이 잘 들어난다. 결국 토니오 크뢰거는 스스로를 경계에 있어 양쪽 의 삶에 모두 안주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말하게 된다.
중편소설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문장이 정말 길고 길어서 흐름을 놓치면 읽기 쉽지 않지만 집중력을 가지고 읽다 보면 문장의 아름다움을 넘어 토마스 만의 고민과 방황, 삶을 바라보는 혜안에 놀라게 된다.
나는 과연 어느쪽에 서있는 사람일까. 토마스 만은 스스로를 정말 경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이래저래 복잡한 마음이 든다. 좋은 소설이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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